[기고] 강용수 전 세종시의회 부의장
상태바
[기고] 강용수 전 세종시의회 부의장
  • 세종매일
  • 승인 2019.11.12 13:2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죽음보다 강한사랑 손양원’ (1)
▲강용수 전 세종시의회 부의장.

손양원은 목회자다. 그의 삶은 사랑, 용서, 화해, 헌신이었다.

그래서 그를 동양의 작은 예수라 부르기도 한다. KBS 방송사(2013년 12월 25일)에서 성탄특집으로 ‘죽음보다 강한사랑 손양원’의 일대기를 방영하여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준 다큐멘터리가 있다.

‘연탄 길’의 저자(著者)로 2000년도에 첫 선을 보인 베스트셀러의 이철환 작가가 내레이션을 맡아 걸작(傑作)다운 면모를 더하여 준 작품이기도 하다.

그는 손양원의 딸(손동희)이 쓴 ‘죽음보다 강한사랑 손양원’에 대해, 그것은 신에게서 상처 입은 인간. 즉 분노와 미움, 원망이라는 독기가 온 몸에 퍼진 한 소녀의 가엾은 고백이라고 하였다.

그렇다! 그것은 소녀가 어렸을 때 보고, 듣고, 겪은 자기 가족의 이야기를 꼼꼼히 기록해놓은 일기장 같은 노트 때문일 것이다. 그 어린 소녀의 마음속에는 늘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어찌 이럴 수가 있을까!

왜 하필이면 우리 가족을 이렇게 흔들어 놓으셨냐고 울부짖던 피 눈물이었다.

남들은 ‘순교’를 거룩하다고 하는데 그까짓 순교가 두 오빠의 죽음과 연이은 아버지의 죽음보다 더 거룩할 수 있는 거냐고 하나님을 향해 마구 덤벼들었던 그 당시의 분노(忿怒)가 오늘에 이르기까지 고스란히 남아 있는 듯하다.

그 소녀의 아버지 손양원은 25세 때부터 나환자들을 위한 목회를 시작하였지만 막상 그들을 눈앞에서 대하기는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손과 발은 구부러지고 얼굴은 뭉그러지고 눈썹이 빠진 나환자들!

사람들은 살이 썩어들어 가는 나환자들을 보고 하늘이 내린 형벌 즉, 천형 또는 용천백이 라고 불렀다. 손양원 목사가 ‘애양원’에 부임되고서는 세상으로부터 소외되고 고통받았던 수 많은 나환자들이 그곳을 찾아 왔다고 한다.

그는 가장 낮은 곳의 사람들을 안아주고 나환자들의 눈물을 닦아주기 위한 사랑과 꿈이 있었음을 그의 기도문(祈禱文)을 통해 알 수 있다.

“사람들이 병으로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얼굴이 무섭게 변해있어 대하기가 힘이 드오니 무섭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환자들의 살이 썩으니 냄새가 심합니다. 냄새를 못 느끼게 하여 주옵소서”, “처음 나환자들을 위한 목회를 시작했으니 나중 환자들을 위한 목회로 끝나게 하여 주옵소서” 결국 그의 기도는 이루어졌다.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가보지 않던 나환자 방에 가서 직접 손도 잡아주고 기도해주고. 위로 해 주기 시작하더니 그는 하루의 대부분을 환자들과 함께 지냈다.

특히, 얼굴은 일그러져 진물이 줄줄 흐르고 손가락과 발가락이 없는 중증환자들에게서 지독한 냄새가 진동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런 분들에게 더 많은 애정을 쏟아냈다고 한다.

나병의 상처에 사람의 침이 약(藥)이 된다는 얘기가 있자, 입으로 피고름 빨아내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그걸 보다 못한 환자들은 걱정스러움에 말리기도 했지만, 차라리 나도 병에 걸려 너희와 함께 지내고 싶다는 그 말에 ‘애양원’은 눈물바다가 되기도 하였다.

그는 누가 보더라도 나환자들의 아버지라 불릴 정도로 그의 삶은 양(羊)들을 위한 희생이었다.

한편, 일제 치하의 암흑기 시절은 애국지사들에 대한 탄압으로, 그분 또한 적지 않은 시련을 겪어야만 했다. 일제의 계속된 억압에 못 이겨 장로교 총회마저 신사참배에 나서게 되었고 그가 다니던 평양 신학교마저 폐교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의 신앙 고백(告白)에서와 같이 십자가 지키는 일에 거리낌은 전혀 없었다.

“땀도 흘리지 않고 눈물도 흘리지 않고 피도 쏟아 붙지 않으며, 많은 행복을 탐욕적으로 원하는 어리석은 사람 중에 혹시 나는 아닌지 반성해 본다”, “내 목에 매인 십자가 예쁘게 지고 나아가리라. 너는 십자가 지기를 꺼려하지 말라!”는 말씀에 의지하여, 그 어떤 고난의 길이라 해도 마다하지 않고 인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광기(狂氣) 어린 일본 놈들이 신사참배(神社參拜)를 한참 강요할 때인 1940년 9월 25일이었다.

들판은 황금빛으로 물들어 풍요롭고 아름다운 가을 풍경이었지만 ‘애양원’ 지붕위에는 먹구름이 끼어들기 시작했다. 갑자기 일본 형사들이 나타나 소녀의 아버지를 끌고 갔다.

이미 사태를 짐작이라도 한 듯 화색이 되어 있는 어머니에게 걱정하지 말고 기도나 해 주구려 그 짧은 말 한마디 남기고 해방이 되는 날까지 5년 동안이나 형무소에 갇혀 있어야 했다.

소녀는 아버지가 몹시도 보고픈 날에는 오빠들로부터 배운 서투른 글씨로 아버지에게 편지를 썼다. ‘아버지가 보고 싶어요. 아버지가 나오는 게 소원이에요.’ 어린 딸이 보낸 편지를 내내 보물처럼 간직했던 아버지였다.

손양원 목사님이 안 계신 ‘애양원’은 모두 쫓겨나 뿔뿔이 흩어져 살 수밖에 없었다.

아들들은 화전민(火田民)으로 어린 딸들은 고아원으로 그리고 나환자들은 진주 남강다리 밑을 비롯한 각자의 처소에서 구걸하며 겨우겨우 살아가고 있었다.

손양원이 옥중에서(1942년 10월 14일) 아내에게 쓴 편지가 있다.
“여보! 나는 솔로몬의 보배보다. 욥의 고난이 더 귀하고 솔로몬의 지혜보다 욥의 인내가 더 아름다워 보입니다. 당신이 나를 위해 조금도 염려하지 마시오. 한 덩어리의 주먹밥 한잔의 소금국이야말로 신선한 요리요 천사의 떡 맛이라오.”

그리고 나환자들에게는 “얼마나 고생들 하십니까? 밤이 지나면 낮이 오는 법이요! 겨울이 지나면 따뜻한 봄이 오는 법입니다. 어떤 고난이라도 다 자족(自足)하게 여깁시다.”

일본 놈들은 옥중에 있는 그에게 전향(轉向)을 요구하며 모진 고문과 협박을 가하기도 했지만 그는 끝내 믿음을 굽히지 않았다.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봄날은 왔다!

해방이 되었단 말이다.
소녀의 아버지는 혹독한 고문에 시달려 야위고 수척한 모습으로 그날 저녁 무렵 ‘애양원’에 다시 돌아왔다.

뿔뿔이 흩어졌던 ‘애양원’ 식구들이 다시 모이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봄날 같은 3년이 지나고 기막힌 날이 또 오고 말았다.

또한! 가을 하늘만큼이나 늘 부푼 꿈에 젖어 있던 16살의 소녀에게는 어디에도 불길한 징후는 없어 보였지만 1948년 10월 19일에 여순사건이 일어났던 것이다.

당시의 좌익과 우익의 이념 갈등이 폭발하여 벌어진 사건이지만, 소녀의 입장으로 보면 공산당을 따르지 않고 예수를 따른다며 ‘기독학생회원’들을 무참히 죽인 사건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그 속에는 소녀의 두 오빠 동인, 동신을 포함해 2천6백 명의 안타까운 주검들이 거리에 널려 있다 보니 그야말로 생지옥이 따로 없었던 것이다.

두 오빠의 죽음에 ‘애양원’은 큰 충격에 빠지고 말았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