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산과 관촉사, 산아래 관촉리 이야기|
탑정호 신작로는 반야산 얘기보따리 싣고~
“형, 대통령하고 똑같은 사람이 왔다!”
천년고찰 이야기는 끝이 없다. 아래 이야기는, 책에 나오는 정사(正史)를 들춰보지 않은 채 적어내려간 관촉사와 반야산, 그리고 산아래 이야기들이다. 관촉1통에서 ‘셋집매’라는 농가맛집을 하는 조효상 씨, 정옥규 문화해설사, 류제협 전문화원장, 소설쓰는 홍미경 씨, 혜광 주지스님 등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들이다.
자애로운 엄마 비로자나불, 이제는 경내로
<논산문화> 2013년 가을호에 “관촉사의 첫이름은 관족사(灌足寺)”임을 밝힌 류제협 전 문화원장이 각별 애정하는 불상이 있다. ‘산아래’ 식당 옆 안씨집의 돌부처다. 충남유형문화재 88호인 비로자나석불입상은 현재까지는 개인 소유이다. 집 마당으로 한발짝 더 들여놓아서 노출도 잘 안 되고 사유지라서 은닉된 느낌이지만, 조심스레 들어가 보면 언제 보아도 마음씨 후덕한 시골아줌마다. ‘미륵불 엄마상’으로 통하는 이 돌부처를 그 동안 관촉사 경내로 옮기려는 노력이 부단 이루어졌지만 별무신통이었다. 최근 주인장의 심경 변화가 있어서 관촉사로 이전 논의가 급물살을 타고 있는 실정이다.
‘치마바위’가 있는 암자도 개인 소유여서 외부 노출이 어렵고, 약수물만 흘러나온다. 호랑이바위→ 나한신바위→ 치마바위는 배바위(대바우), 혹은 말굽바위로 하산하는 듯한 점철이다. 그 호랑이가 어디가 있나 했더니 돌이 되어서 셋집매 앞마당에서 빙그레 웃고 있다(쌍 까치호랑이). 셋집매, 세 집만 있던 이곳 관촉1통은 2통에서 내려온 사람들로 채워져 예전 2통보다 동네가 더 커졌다. 결과적으로는 합쳐서 100여 호 안팎인데, 관촉1통 칠석날 동네잔치는 아랫마을, 윗마을에 하나씩 있는 왕버들 아래서 번갈아가며 한다. 가야곡쪽에서 나오는 첫 관문 관촉리1번지는 번화가로서 능수버들 한 그루였고, 현재는 베어졌다. 관촉사 주차장 왕버들 한 쌍 중 하나는 고사되어 가차 없이 베임을 당했다.
"형, 대통령하고 똑같은 사람이 왔다!"
사라지는 게 나무뿐이랴? 한때 잘 나가던 권세도 스러져가며 부침을 거듭하는 게 인생사요 자연사다. 1974년 광복절, 총성이 울렸다. 육영수 여사가 쓰러졌다. 그로부터 두어 달 후, 관촉사 앞에는 똑같은 차가 서너 대 들이닥쳤다. “형, 대통령하고 똑같은 사람이 왔다!” 개를 끌고 산책 나갔던 조인상(현 놀뫼금고 이사장)이 조효상 형에게 알렸다.
육영사 여사 모실 자리를 알아보기 위해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내려왔다. 시간이 얼마간 지나서 동네주민 조한익 씨가 대통령 앞으로 호출되어 갔다. 당시 조한익 씨는, 일주문 안쪽에서 일심상회라는 기념품 가게를 하고 있었다. 관촉사 경내에서는 사진 찍어주는 업도 겸하였다. “각하 앞에서 은진미륵에 대하여 설명해보라”는 특명이 떨어졌다.
동네 어르신도 잘 모를 법한 금동불 이야기도 했다. 미륵불 위에 두 개의 관이 있는데 그 사이에 검은 고리가 장착돼 있다. 뭔가를 걸어두기 위한 고리다. “왜정때 거기에 금동불이 걸려 있었습니다.” 높이 19m, 폭이 11m인 미륵불은 귀만 해도 2.8m이다. 맨 꼭대기 관과 그 밑의 관 사이에 어떤 금동불이 걸려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거기에 금동관이 걸려 있었던 것만큼은 사실이라고, 이러저런 비사를 들려준 것이다.
당시 논산군청에서는 대통령 방문 소식을 아무도 몰랐다. 빅뉴스를 알려야겠다는 생각에서 조한익 씨는 종무소에 들어가 전화기를 들었다. 그러나 그의 손 위에 곧바로 경호원 손이 덮쳤다. 군청과의 전화는 세단들이 떠나간 후에야 가능했다. 벌곡에 있던 이남우 군수는 다음날 워커를 신고 관촉사로 출근했다. 그날 저녁에 ‘관촉사 진입로를 포장한다’는 늬유스가 나왔기 때문이다.
아스팔트 포장 공사는 군인출신의 군수 진두 지휘 아래 군인들까지 동원, 속전속결,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당시 떠돌던 말 “차 타고 가는데 각하 궁둥이가 흔들거리기만 해도” 그 길은 아스팔트로 포장됐던 시절이었단다. 어쨌거나 관촉사 초입인 ‘산밑마을’은 난리가 났다. 지금 남아 있는 일주문 안팎으로 해서 신작로 양쪽으로믐 기념품 가게가 13개가 도열해 있었는데, 도로를 확장하는 바람에 대여섯 집은 강제 철거당하였다. 그 후 관촉사에 박대통령 부부의 사진이 걸렸으나 지금은 수많은 위패 속에 하나로 묻혀 있다. 이승만 대통령도 관촉사에 위풍당당 들렀고 입구에는 그를 기리는 비도 있건만, 애물단지로 홀대받고 있다.
반야산이 품은 이야기보따리, 어울렁더울렁
조효상 씨 안내로 일심상회 문을 따고 들어갔다. 안에는 관광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기념품들이 여전하다. 먼지가 쌓여 있다. 조한익 옹이 86세로 세상을 떠났고, 그 후 가게를 접었지만 가게는 그대로 놔둔 상태다. 돌아가실 때만 해도 조 옹은 건강한 편이었다. 4년쯤 전 기자는 이승만 이승만 대통령을 추모하는 허름한 비석을 취재하고자 관촉사 초입 화장실을 들렀다.
내려오면서 길가에서 동네분을 만나 인사를 드렸더니, 본인이 ‘사진사였다’ 소개하면서 박정희 대통령 얘기를 들려준다. 기자 머릿속은 이승만 대통령 이야기 하나만으로도 포화상태여서 “어르신, 나중에 별도로 시간 내서 찾아뵐게요” 그러나 시간과 파도는 사람을 기다려 주지 않는다 했던가! 가게 안쪽의 방을 여니 사진과 상패가 보인다. “우리 아버지는 공주고 졸업 후 평생을 예서 보내셨죠. 사진사 하면서 이장, 지도자... 동네일 안 해본 게 없이요.”
이어지는 이야기는 불났을 때다. “불이야 소리가 나서 뛰어가 보면 165cm 단신인 우리 아버지는 벌써 초가집 지붕 꼭대기에 올라가 있는 거예요. 소방차가 없던 시절, ‘불났다’ 소리치면 이내 징 소리가 울려 퍼졌죠. 남자들은 쇠스랑이나 곡괭이를, 여자들은 양동이나 바가지를 갖고 나와 물을 쪈뜨렸던 시절입니다.”
그 불 말고 교육열(敎育熱)도 대단했단다. “너희들 유학까지 간다면 내가 죽을 먹더라도 보내줄 거니까...” 가게는 부인에게 맡겨놓고 본인은 경내로 들어가 사진사로, 그러나 평생 맞벌이는 부인이 72세로 먼저 가면서 외벌이가 되었고, 그 후 죽을 때까지 현역이었다. 조효상 씨의 할아버지는 방앗간과 함께 목화 솜타는 공장도 겸했다. 이웃마을 사람들이 고지 먹고(선불 받고) 관촉리에 건너와 일하던 호시절이었건만 그 재산은 오래 유지되지 못한 듯하다. 조 옹은 둘째 아들이 논산농공을 들어가자, 농사지을 땅이 필요하겠다 싶어서 그때부터 땅을 장만하기 시작했다니 말이다.
셋집매벼육묘장을 시작한 조효상 씨는 4년 전 농가맛집 ‘셋집매’를 열었다. 가족경영 체제인데, 이제는 유학까지 다녀온 아들이 귀농을 생각할 정도로 일이 많다. 관촉사와 탑정호 사이의 들판에 출렁다리 관광붐이 일면서 로봇박물관이나 레스토랑 들이 하나둘씩 들어서는 조짐이다. 그 들판을 반야산이 내려다 보고 있다. 유튜브 조회수 수억을 자랑하는 “범 내려간다” 소리가 관촉사 범종 소리와 함께 울려퍼지려는 즈음이다.
미륵불 주변 주상절리의 수난
관촉사 경내는 둘러볼 거리 지천이다. 꿈을 이루기 위해 사람들은 관촉사에 와서도 여러 가지를 한다. 병풍처럼 미륵불을 둘러싼 돌 위에 음각된 한자들이 눈에 들어온다. 처음에는 강경 옥녀봉 해조문처럼 예전에 새겨진 역사적 문구인 줄 알았다. 자세히 보니 사람 이름 석자들이다. 대체 그 돌벽을 어떻게 올라가 저리도 정교하게 새겼는지 불가사의해 보인다.
대웅전보다 삼신각을 더 중시하는 사람도 있는 거 같다. ‘삼신각 어딘지’ 묻는 이에게 “여기는 삼신각 아닌, 삼성각이네요.” 그 가파른 길 따라 올라간 김에 삼성각에서 우향후, 미륵불 측면과 후면 사진도 찍을 겸 좀더 올라가 보았다. 아래에는 동그란 십자가, 위 너럭바위에는 대형 점철(點綴) 십자가가 내려다 보인다. 처음에는 무슨 발파 구멍이겠지 하면서 무심히 봤는데, 그 정교함이 아닌 성싶다. 십자군 전쟁은 동양 어느 나라 산속에서도 현재진행형인 모양이다.
은진미륵 눈높이에서 내려다 보이는 지산동~관촉1~2통~성덕리 벌판은 강이었다고 한다. 서해 바다에서 올라오던 배들이 고된 짐을 풀던 ‘표진강’ 마루의 이름은 시진포(市津浦), 은진(恩津) 여기서 津은 나루 진이다. 신탄진, 노량진에서처럼....
정옥규 문화해설사에게 해설을 청하였다. 관촉사(灌燭寺) 이름 이야기가 흥미롭다. 해설사를 시작한 지 10여 년 됐는데, 초창기에 ‘관촉사 한자가 틀렸다’는 지적을 종종 받았단다. 관음(觀音)보살의 관觀이 맞지 왜 ‘물댈 관灌’자냐면서 고칠 것을 종용했다고. 관촉사 이름에 대하여 기자는 문헌과 상상력으로 “이름따라 삼백리; 쌘뽈Saint Paul과 관촉사灌燭寺”를 쓴 적이 있다.
지명으로 펼쳐보는 미륵의 세계
기자보다 해설사의 주장은 실증적이다. 관촉사는 물이 많았단다. 명부전에서 삼성각 오르는 길목에 물길이 있어 여름날은 시원하게 세족도 했단다. 지금 그 물길(灌漑水路)은 미륵불 발 앞 땅 밑으로 흘러가도록 복개해 놓았지만, 미륵불 뒤편으로 보면 이 가뭄에도 암반 위에 물이 조금 고여 있다. 예전에는 발이 물에 잠겨 있었고, 그래서 관촉사는 물 많은 관족사(灌足寺)일 수도 있겠다는 비약이다.
이런 상상의 출발점은 ‘은진미륵이 어떤 형상으로 보이느냐냐’다. ‘미륵불이라기보다 관음상 이미지로 보인다’는 의문 제기에 어떤 답이 타당할까? 고려 초창기라서 미래 지향적인 미륵에 방점이 찍혔지만, 물가나 바닷가 용왕신과의 연계도 가능하다. 미륵은 발음상 ‘미르’와도 흡사한데, 논산 지역에서의 용 신앙은 강경의 미냇다리에서도 찾을 수 있다(미내, 미르=용).
어쨌거나 관촉사는 물이 많은 곳이다. 일제말, 물천지로 상전벽해한 탑정리 저수지쪽에서 관촉사를 볼 때, 반야산은 동쪽을 보고 누워 있는 소(와우 臥牛) 형상이다. 논산시의 상수원이던 상수도보호구역(‘들꽃’ 좌측 산)은 소머리다. 시래기정식으로 유명한 맛집 ‘산아래’는 쇳골재로 소 목 부분이고 ‘북천’으로 불렸다. 소 목을 타고 남쪽으로 앞다리는 ‘안동네’, 뒷다리는 ‘산밑마을’이다. 그 중간에 위치한 미륵불은, 소젖통이다. 그러니 물이 많을 수밖에 없다는 풍수지리다.
물은 관촉사 경내의 약수도 좋지만, 내려와서 안동네의 무속인 집이 된 물이 이 동네의 젓줄이었다. 사유지가 되면서 주인이 관을 바깥 벽으로 빼놓았다. 현재 이 물을 가장 많이 떠가는 사람은 주차장 배바위에서 100일 기도중인 약사할머니다. 청송에서 오신 이 할머니는 주차장 뒤편에 장기주차를 하면서 낮에는 하루 종일 나무 밑에, 밤에는 차 안으로 들어가는 생활을 한다. 무더위를 무릅쓰는데, 하루 종일 하늘과 우주의 기를 온전히 받아들이기 위해서란다.
경전으로 배우고 깨닫는 게 아니라 일월성신과 대화하는 가운데 자연계시를 받고, 불치병 환자도 그렇게 고쳐왔다는데.... “기도 장소를 왜 논산으로 정하였나요? 차 옆에는 사람들이 쓰레기도 버리는데...” ‘미륵불에게로 가라’는 선몽을 동일하게 세 번 꾸었고 ‘거기가 어딘지 가르쳐 주십사’ 구하니, 아들 군대갈 때 따라왔던 논산시 은진면을 점지해 주어서 왔다고 들려준다.
반야산 은진은 이토록 영험한 모양이다. 물도, 바위들도 각기 자기만의 전설과 이야기를 품고 있는 곳이다. 주차장 앞에 대바우라는 표지석이 서 있다. 배를 매두었던 ‘배바위’가 발음하다 보니 ‘대바우’로 바뀌었을 수도 있고, 관촉사 서쪽이 죽암(竹岩) 마을여서 ‘대’자를 쓴다는 설이 병기되어 있다.
반야산의 물, 바위 시리즈
죽암(竹岩), 반야산에는 대나무와 바위가 많다. 관촉사 매표소를 통과하여 좌측으로 빠지면 반야산 등산로이다. 중턱에 오르면 오래돼 보이는 건물 두세 채가 서 있고 주변이 널럴하다. 차량도 진입 가능한데, 건양대 옆길로 해서 올라와 좌회전, 막바지다.
주차장에서 좌회전, 시민공원 내동쪽으로 더 나아가면 전망대 못 미쳐서 바위 둘이 있고 그 사이로 사람 하나 다닐 만한 공간이 나온다. 호랑이바위다. 그 바위 위에 호랑이가 앉아 산 아래 굽어본대서 산밑사람들이 붙인 이름이다. 한여름에도 땀내며 걷는 시민 십여 명에게 호랑이바위를 물었지만 하나같이 금시초문들이다. 이제부터의 이야기는 관촉에서 5대째 살아가는 셋집매 주인 조효상 씨의 이야기다. 할아버지, 아버지때부터 전해내려온 이야기들이란다.
은진미륵 자체도 바위다. 바위가 솟아났고, 그 위에 중단, 상단을 굴려서 올렸다는 혜명스님의 전설 같은 이야기는, 하단이 암반 위에 그대로 솟구쳐 있는 걸로 보아 전설보다는 실제일 가능성이 높다. 거석신앙이 불교와 만난 현장일 수도 있다. 솟은 바위 미륵불 주변을 병풍처럼 감싸고 있는 주상절리는 미륵불을 보호하는 ‘나한신’으로 보기도 한다. 삼성각으로 올라가서 오른쪽으로는 길이 없다. 억지로 해서 암벽을 넘으면 틈바구니가 나오는데, 숙향이굴이다. 원님에게 수청들기를 거부한 숙향이라는 아낙이 숨어 지내던 굴로서, 표진강 내려가 물고기 같은 거 잡아먹으며 들락날락했다는, 산부인과 바위 틈새다.
삼성각에서 왼쪽길로 꺾으면 바위 하나가 솟구쳐 있다. 위는 남근, 아래는 여근, 그러나 동네서는 그냥 남근바위라 불렀다. 해탈문을 통과하자마자 마당에서 반기는 너럭바위는 ‘거북바위’다. 호사가는 거북바위를 엄마, 명부전 위의 남근바위를 아들 바위로 구분하기도 하는 모양이다.
1910년대 관촉사 사진을 보면, 관촉사는 미륵불과 사찰 하나뿐이다. 현재 서 있는 여러 건물들은 30여 년 전에 신축되었다. 마당 전체도 1미터쯤 흙으로 돋아졌다. 그러니 경내 들쭉날쭉하던 바위들은 물론 기단이나 석종도 묻혔다. 거북바위가 어딘지 모르게 숨막혀 보이고 은진미륵이 약간 낮아 보이는 소이가 여기 있다.
이진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