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룡시 태동과 육성, 비전의 주인공을 만나다
최홍묵 계룡시장의 우공이산, 우보만리
오는 9월 19일이면 계룡시가 개청 18주년을 맞이한다. 지난 2003년 9월 19일 충청남도 계룡출장소에서 계룡시로 승격되며 충청남도 16번째 자치단체로 첫 발을 내딛은 계룡시는 그동안 많은 변화와 눈부신 성장을 이뤘다. 계룡시의 역사를 이야기하자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바로 최홍묵 계룡시장이다. 계룡시 탄생의 산모(産母) 최홍묵 시장의 우공이산, 우보만리 이야기를 펼쳐본다.
우공이산(愚公移山)의 뜻을 품다
최홍묵 시장은 1949년, 논산군 두마면 광석리에서 태어났다. 현재는 계룡시 엄사면 광석리이다. 당시 두마면은 농토가 비옥한 논산에 비해 환경이 척박해 먹고 살기 힘들었다. 그래서 그는 늘 배곯지 않고 잘사는 고향을 꿈꿔왔다. 그것이 정치를 시작하게 된 가장 큰 동기(動機)다. 최 시장은 “정치인이 되겠다는 욕심이 아니고, 내 고향 계룡을 충청 제일의 고장으로 만들겠다는 꿈으로 정치를 시작하였다”고 회고한다. 다음은 2018년 민선5기 시장에 당선되면서 당시 필자와 했던 인터뷰 내용 중 일부다.
국사봉을 바라보며 우직하게 앞만 보고 걷다보니 어쩌다 4선 시장이 되었다. 나는 의도적으로 역사를 쓰려 하지는 않았지만, 이런저런 현대사의 최일선에 서 있었다. 계룡시의 개청이 특히 그러하다. 인구 10만이 넘어야 성립 가능한 시(市))가 계룡시에서는 3만1천 명으로 출범했다. 2003년 9월 19일 충청남도 계룡출장소에서 계룡시로 승격되었고, 충청남도의 16번째 자치단체로 탄생했기 때문이다.
우여곡절이 많았다. 1998년 계룡시‧ 증평시 설치를 위한 법률(안)을 국회에 상정하였지만 국회 임기 만료로 폐기되고 말았다. 논산시민단체와 의원들 반대도 얼마나 극심했던지, 그야말로 외우내란이었다. 와중에도 2001년 김대중 대통령이 충남도 방문시 특례시 설치를 약속하였고, 2003년 계룡시 설치에 관한 법률 제6929호가 공포되어 9월 19일 계룡시가 공식 출범하게 된 것이다.
3군본부가 집결한 계룡시, 최 시장은 거기에 걸맞는 고품격 행정도시 계룡의 산파가 된 것이다. 척박하기만 했던 은둔의 땅 논산군 두마면이 때가 이르매 등용문을 거쳐 계룡(鷄龍)이 되고 비룡(飛龍)으로 상전벽해한 것이다.
최홍묵 시장 부인이 전해주는 이야기
평시 과묵하기로 소문난 최 시장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기는 하늘에 별따기보다 힘들다. 그래서 우회전략을 택해 그의 가장 큰 조력자인 부인 김영자 여사를 만나보았다. 김 여사는 지역사회 내에서 효부로 소문이 자자하다. 지금은 두 분 다 작고하셨지만, 시어머니와 친정어머니를 동시에 10년 이상 모시고 살았다.
시집 와보니 깡촌
저는 고향 평택에서 어머니와 남동생과 함께 농사를 지으면서 살고 있었어요. 서울에 있던 오빠가 시장님이 마음에 들으셨는지 저에게 소개해 주셨어요. 그래서 시장님과 결혼을 하게 되었죠. 결혼하기 전에 오빠가 시댁에 한 번 방문하였고, 시장님도 우리집에 오셔서 인사하고 가셨는데, 저는 가보지도 못했어요.
결혼을 해서 시댁에 왔더니 산골도 너무 산골이더라고요. 결혼하자마자 바로 내려왔으니 1975년쯤 되었겠네요. 전기가 그 해 들어왔으니까요. 시댁에 와보니 증조시할머니, 시아버지, 시어머니가 계시고 시장님 형제까지 아홉 식구 대가족인 거예요.
큰 아가씨만 빼고 나머지 동생들을 제가 다 뒷바라지를 했어요. 그 살림을 스무살 중반짜리 새댁이 다 해내려니 힘에 겨웠지요. 그런데 무엇보다 시부모님이 ‘못한다’고 야단한 적이 없고 예뻐해 주셔서 그나마 제 앞에 주어진 일들을 슬기롭게 헤쳐나갈 수 있었어요.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러다 우리 막내가 태어나고 얼마 안 됐을 때, 시장님이 음료공장을 하게 됐어요. 그때 애기를 업고 큰 아이는 손을 잡고, 머리에 이고 그러면서 직원들 음식까지 했어요. 야근한다고 하면 야근 밥까지 다 해주면서 어르신들도 모셔가면서 일을 했죠. 지금 뒤돌아보면, 젊었으니까 할 수 있었던 거 같아요.
시의원에서 시장으로
애들이 초등학교 들어갈 무렵인데, 주위에서 자꾸 논산시의원에 출마하라고 권유하시는 거예요. 시장님은 어렸을 때부터 어려운 사람을 보면 자기 돈 써가며 도와주고 마을일에는 솔선수범 봉사하고 그랬어요. 그렇게 주위에서 시의원을 권유하여 두마면 시의원으로 출마하게 되었고, 1998년 논산시의원으로 당선되었어요. 그러다 보니까 정치에 발을 딛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를 추천해주고 지지해준 사람들이 있는데, 그분들을 위해서라도 최선을 다 해야겠다 생각하며 오늘까지도 그런 초심을 잊지 않고 생활하고 있습니다.
우리 계룡시는 충남의 다른 도시에 비해 젊지만 노령화도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는 도시이기에 세대별 균형발전과 서로 간 이해와 소통을 기반으로 한 정책마련을, 시장님은 늘 고민하셨어요. 또한 이동이 잦은 군인가족과 기존 자연부락 토착민과 이주민들 간에 이해와 화합할 수 있는 방안 마련에도 고심이 많으셨죠. 이에 시장님은 처음부터 "효(孝)"와 "소통"의 "효소행정"을 바탕으로 "효" 정신을 일깨우고, "시민과의 소통"을 통해 행정의 투명성과 신뢰성을 제고해 나가겠다는 정책을 세우셨던 겁니다.
2002년 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하며 논산시의회 의장으로 선임되었어요. 당시 시장님은 계룡시 탄생과 관련하여 계룡시 개청의 분수령이 된 논산시의회의 찬성의견을 받아낸 주인공으로 계룡시 탄생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셨죠.
시장님이 논산시의회 의장으로 재직할 당시, 계룡시 분리를 반대하는 논산시민들에게 계란 투척 및 밀가루 세례 등 온갖 수모를 당하였답니다. 청사출입도 반대시민들의 눈을 피해 후문을 이용하는 경우가 다반사였고요. 그렇지만 시장님은 계룡시 탄생을 위해 동료의원들을 꾸준히 설득하여 논산시의원들의 만장일치로 논산시의회 찬성의견을 이끌어내셨습니다.
시장님은 누구보다도 추진력이 뛰어나십니다. 뜻을 한번 정하시면 밀고나가는 힘이 매우 강하세요. 중국 고전에서 '우공이 산을 옮긴다'는 우공이산(愚公移山)이 바로 시장님을 두고 한 말 같습니다.
시련과 새로운 시작
시련도 있었습니다. 민선1~2기 연속으로 당선 후, 3기때는 낙선의 고배를 마셨어요. 그간 과묵했던 시장님이 고자세로 비치지 않았는지?, 낮은 자리로 내려가는 것이 내심 내키지 않았는지?, 시장님 자신과 인생 전반을 돌아보는 전환점이 되었어요.
"진심 어린 마음으로 고향의 품에 다시 안기고 보니, 비로소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이고, 들리지 않았던 것들이 들리기 시작했다"고 시장님이 늘 말씀하셨어요. 그때 시장님은 "입은 작아지고, 귀는 커졌다"고 농담 섞인 말씀을 하셨죠. 그때 시장님은 시민들과 함께 '계룡 100년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구상하셨어요.
그리고 그 동안 충실하지 못했던 집안도 돌보셨죠. 시장님이 평소 강조했던 효(孝)도 좀더 구체적으로 실천할 겸 친정어머님을 모셔오도록 하셨어요. 집에서는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 밖에서는 전임 시장이라기보다는 한동네 이웃으로서 막걸리잔 기울이며 주위의 말씀에 귀 기울이며 지내셨어요, 입은 닫은 채로요.
계룡시 개청의 또다른 주역 심대평 전 도지사 회고담
다음은 2019년 8월 26일 필자가 대전코레일 소회의실에서 심대평 전)도지사와 인터뷰한 내용 중 일부다.
계룡시 산파의 주역 최홍묵
계룡시가 탄생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3군본부' 이전입니다. 1989년 1월 1일, 충청남도에서 대전시를 분리하였고, 1989년 논산군 두마면에 3군본부가 들어서게 된 것입니다. 처음에는 육군, 공군 순으로 들어섰으며, 1993년 해군본부가 이전하며 3군본부 이전이 완료되었습니다. 충청남도 계룡출장소는 1990년 두마면에 만들었습니다.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계룡시의 역사는 그때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계룡시 탄생이 올해로 '18년'이 아니라 '32년'이라고 해야 맞지 않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해요.
2003년 도지사 시절, 국회에서 계룡출장소를 특별시로 만드는 협의과정에서 "계룡시는 인구와 면적에 상관없이 국가안보를 위해 꼭 필요한 상황이다" 그러니까 "국가가 지원을 해야 한다"는 논리를 폈고, 그래서 계룡시가 탄생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시 개청은 도지사 한 사람이 앞장선다고 해서 될 사안이 아닙니다. 청와대와 협의 후로도 논산시민과 계룡시민이 계룡시를 만드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여 주었습니다. 당시, 논산시의회 의장이던 최홍묵 시장의 지혜와 노력이 없었다면 계룡시는 아마 탄생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논산시가 합의를 안 해주면 할 수가 없었던 상황이었으니까요. 이런 우여곡절 끝에 계룡은 14년 만에 시로 승격될 수 있었습니다.
심대평 도지사는 끌고, 최홍묵 의장은 밀고
최홍묵 시장과 저는 계룡시 승격을 논의할 당시, 가장 중요한 설득 논리는 '계룡시의 규모'가 아니라 '계룡시의 특색'이었습니다. "계룡시는 3군본부가 있는 안보의 핵심도시로서 3군본부가 위치한 계룡시에 가족을 맡기면 가장 안전하고 확실한 미래를 보장받을 수 있는 도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계룡시 승격의 설득 논리였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 청와대도 국회도 반대 의견을 제기하지 못했습니다. 또한 3군본부가 있는 군사 전원 문화도시를 조성하면서 면단위 행정으로는 불가능하며, 충남도 직할출장소 설치 때부터 시규모로 출발하였다는 점을 명분으로 세웠습니다.
전원.문화.국방수도 건설을 위한 우직하게 우보만리(牛步萬里)
마음으로 일구는 중지성성(衆志成城)의 성읍 계룡(鷄龍)
“시장님!!”
하루에도 수십 번 듣는 이 말 속에는 계룡시민과 공직자들의 다양한 목소리와 감정이 실려 있다. '4번의 시장', '2번의 시의원'을 거치면서 그 다양한 소리를 최 시장만의 방법으로 무려 4반세기간 조율했다. 묵묵히 '민군화합 행복도시 국방수도'를 디자인하며 우직하게 우보만리하는 최홍묵 계룡시장을 만나 보았다. 극구 손사래치는 그로부터 ‘계룡 100년의 지속가능한 발전’에 녹아 있는 최 시장의 정치 철학과 그가 펼쳐온 20여 년 정치 일정을 되돌아본다.
계룡 100년의 지속가능한 발전
지난해 벽두부터 시작된 코로나19 바이러스의 대유행은 우리는 물론 전 세계 인류를 뒤흔들어 놓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제는 '포스트 코로나 (Post-Covid19)'를 논하기보다는 '위드 코로나(With-Covid19)'로 코로나와 함께 살아가는 일상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최 시장의 대책을 들어본다.
▪코로나19 바이러스 감염병 사태로 어느 때보다 노고가 많으신데, 포스트 코로나까지 어떻게 대처하고 계신지?
‘방역은 제2의 국방’이라는 김대중 대통령의 말씀과 같이 저와 계룡시 공직자들은 안불망위(安不忘危)의 정신으로 모두 한뜻으로 힘을 모아 강력하게 코로나19 바이러스 감염병 확산을 저지하고 있다.
코로나19는 아주 짧은 시간에 모든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 방식을 바꿔 놓았다. '팬데믹'으로 가속화된 '언택트 사회'는 일하는 방식, 소비하는 방식, 물건 파는 방식, 공부하는 방식, 심지어는 여가를 즐기는 방식까지도 송두리째 바꾸고 있다.
지금 우리는 '문명의 전환'이라는 급류에 속절없이 떠내려가고 있는 듯하다. 언젠가 코로나19 바이러스의 폭풍은 지나가겠지만, 인류의 삶은 이전과 전혀 다른 세상으로 변화할 것이라고 많은 전문가들이 진단하고 있다.
이에 따라 저와 400여 명의 공직자들은 과거에 머물지 않고 새로운 미래에 도전하고자 한다. 시민들에게 희망과 꿈을 심어줄 수 있도록 과거를 뛰어넘는 발상의 전환과 과감한 인적 구성으로 당장의 위기 대응은 물론 코로나19 이후를 위한 "계룡100년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준비하고 있다.
▪"계룡 100년의 지속가능한 발전"은 '포스트 코로나'를 대비한 뉴딜 정책으로 보이는데, 어떤 내용인가요?
저는 늘 "정치는 민심을 이길 수 없고, 경제는 시장을 이길 수 없다"는 진리를 가슴깊이 새긴다. "가혹한 정치와 행정은 호랑이보다 무섭다"는 '가정맹어호(苛政猛於虎)'라는 말이 있듯이, 기업을 쫓아내는 계룡시가 아니라 기업이 찾아오는 계룡시를 만들겠다. "시민과 기업을 '쫓아가는 행정'이 아니라, '선도하는 행정'을 펼치겠다"는 말이다. 그래서 기업하기 좋은 환경이 조성되어 일자리가 넘쳐나고, 삶이 즐겁고 편리한 서비스업 천국, 계룡시를 만들어 보겠다. 이어 역동과 도약이 넘치는 스타트업을 펼쳐 청년세대의 희망을 춤추게 하여 불평등 사회를 포용 사회로 바꿔보겠다.
또한 탄소의존 경제에서 저탄소 경제로 전환하기 위해 사회 전반적 부분들을 지역사회와 공유하여 깨끗하고 안전한 계룡을 후세에 물려줄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이는 에너지 환경문제뿐만 아니라 일자리와 성장 동력 확충, 기업 경쟁력 확보, 생활 계몽과 교육까지 포함하는 인류 미래의 비전이다. 교통, 건축, 문화, 교육 등 모든 사회 경제활동 및 시스템을 포함하여, 심지어는 개인의 라이프스타일도 포함되는 기존의 개념을 뛰어넘는 광범위한 도전이다.
마지막으로 '효(孝)'를 바탕으로 더불어 함께 사는 '보편적 복지'를 실현하기 위해 취약계층 지원을 강화하고 다양한 복지수요에 능동적으로 대응해 복지서비스의 내실을 강화하고 있다. 또한 우리 미래의 경쟁력은 지역 내 유능한 인재에 달려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에 시는 시대에 대응한 인재 육성과 차별없는 교육복지 실현을 위해 관련 조례를 제정하는 등 계룡을 이끌 미래인재 양성에 집중 투자하고 있다.
현재 우리 시는 대실·하대실 지구 도시개발 사업으로 지속적인 도시 성장과 인구 유입의 토대를 마련하고 있다. 2018년 12월 준공한 대실지구에는 현재 5개 블록에 4천여 세대의 공동주택이 건설 중으로, 오는 2023년 입주 예정이다.
아울러, 세계적인 가구기업 이케아 및 동반 쇼핑몰 입점도 가시화되고 있다. 이케아 계룡점 신축공사는 건축연면적 1만7천여 평에 지하1층~지상2층 규모로 판매시설 등이 입점할 계획으로 현재 건축허가가 진행 중이다. 동반업체인 계룡복합쇼핑몰 신축공사는 건축연면적 2만9천여 평에 지하1층~지상 4층 규모로 건축허가를 완료한 상태이다.
이렇게 양질의 다양한 주택 공급은 물론 기업 및 기관 유치 등을 통해 '인구7만 살기좋은 계룡시'로 차분히 성장해 가고 있다.
▪ 미래 100년의 가치를 준비하게 된 배경은?
계룡시는 2003년 개청한 후, 그동안 도시의 면모를 갖추기 위한 인프라 조성과 도시 정체성 확립, 계룡시민으로서의 자긍심 제고를 위한 일에 집중해왔다.
반면, 계룡시는 면적이 60.7㎢로 협소한 데다 이중 45% 가량이 군사보호구역 등으로 묶여 있는 실정이다. 어느 도시처럼 대규모 토지개발, 산업단지 등 도시 확장에 따른 양적인 성장에는 한계가 있어, 시에서는 '양적 팽창'이 아닌 '질적 성장'에 주력해 왔다.
여기에 코로나바이러스 사태로 인한 극심한 경기침체 상황을 극복하고 우리시 미래성장 동력을 이끌어낼 다양한 정책이 필요한 시점에서 준비한 것이다.
우리시는 하드웨어적인 면이 부족한 반면, 도내에서 젊은 인구 비율이 가장 높은 도시로 미래로 도약할 수 있는 든든한 젊은 세대가 뒷받침되고 있다. 2018년 및 2019년 신속집행 최우수기관으로 선정되어, 2년 연속 지방재정 확대 평가 우수기관으로 선정되었다. 그러면서 4억 원의 재정 인센티브 확보, 행정안전부 재난관리평가에서 기초자치단체 부문 우수 등급 선정 등 타 자치단체보다 앞서가는 선진 행정을 구현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미래로 도약할 수 있는 튼튼한 발판을 하나씩하나씩 마련해가고 있는 중이다.
이정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