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이석우 사단법인 이초려기념사업회 사무국장 "초려 선생의 기해봉사는 국정개혁의 청사진이었다"
상태바
[인터뷰] 이석우 사단법인 이초려기념사업회 사무국장 "초려 선생의 기해봉사는 국정개혁의 청사진이었다"
  • 이선형 기자
  • 승인 2023.12.17 22:3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이석우 사단법인 이초려기념사업회 사무국장

초려역사공원이 올해로 개원 8주년을 맞는다. 초려 이유태 선생(1607~1684)은 충청(기호) 유학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초려는 우암 송시열, 동춘당 송준길, 시남 유계, 미촌 윤선거 등과 더불어 충청5현 중 한명이다.

초려의 ‘기해봉사’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양란 이후 실학과 경세관으로 국정개혁하고 북벌을 단행할 것을 주창한 상소문으로 유명하다.

이석우 사단법인 이초려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을 만나 초려의 생애, 사상과 정신 등에 대해 들어본다.

-우선, 충청 유학을 대표하는 인물인 초려의 출생과 생애에 대해 말해 달라
▲초려 이유태 선생은 아버지 이서(李曙)와 어머니 청풍김씨 사이에서 5형제 중 3남으로 1607년 금산에서 태어났다. 당시는 임진왜란의 난리가 지나가고 병자호란의 참화가 일어나기 전 가장 어려웠던 시대였다. 조상 대대로 서울에서 벼슬살이를 하며 살았지만 임진왜란 직후 아버지가 큰아버지 이시(李時)와 함께 금산으로 낙향하였다.

초려는 8세 때에 아버지가 강태공의 낚시질한 일로 운자를 부르니 즉석에서 시를 지어 칭송을 받을 정도로 뛰어난 자질을 지녔다. 10세가 되던 해에 부친을 여의고 애통함이 절절하였다. 그 후 모친과 장형 유택(惟澤)의 보살핌과 엄격한 교육 속에 성장하였다. 

28세(1634)에 참봉으로 벼슬에 나갔으나 병자호란(1636)이 일어나고 벼슬에 뜻이 없었다. 32세(1638)때 무주 덕유산 아래로 이주하여 은거하였다. 시냇물과 바윗돌이 어우러진 자연에 은병서재(隱屛書齋)를 짓고 학자들과 강마하며 제자들을 가르쳤다.

45세에 금산을 떠나 공주의 초외(새오, 현재 대전시 유성구 도룡동)로 이주하였다. 동춘 송준길과 우암 송시열이 가까운 데 살기를 원하여 터를 잡았던 것이다. 이곳에서 유현들과 교류하며 스승 사계 김장생의 저술인 의례문해(疑禮問解), 근사록석의(近思錄釋疑)들을 교정하였다. 49세 때에는 진산으로 이주하였다가 1년 만에 다시 초외로 돌아왔다.

57세 때 같은 공주의 금강 남쪽 중동으로 이사하였다. 이 곳은 초려의 장남 이옹(李顒)이 할머니 청풍김씨가 계셨던 대흥(이 때 초려의 맏형 유택이 대흥현감으로 있었음)을 오가며 이 지역의 경지가 아늑하고 궁벽한 것을 보고 개척하여 집을 지은 것이었다. 용문(龍門) 사송(四松) 두 서재가 있었다.

이 곳에 거주하면서 69세 때에는 예송논쟁에 관련되어 영변으로 유배를 떠났다. 2차 예송에서 1차 예송 때 기년설을 주장한 것이 탄핵된 이유였다. 이때 절친 송시열과도 예론과 관련하여 소원해지게 되었다. 74세 때 경신대출척으로 유배에서 풀려나 공주 중동으로 돌아와 독서를 즐기다가 78세로 서거하였다. 묘소는 세종시 초려역사공원 내에 있다.

초려의 삶은 세파와 당쟁에 휘둘리지 않는 고고한 낙락장송과도 같은 삶이었다. 다사다난한 삶을 4글자 한마디로 표현하면 ‘화이불류(和而不流)’였다. 이 말은 일찍이 김익희가 효종에게 초려를 천거하면서 “순수하고 근신하며 우아하고 믿음직하여[醇謹雅飭] 화합하면서도 물들지 않습니다.[和而不流]”라고 평한 말이었다. 

-그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 교우관계, 학맥과 연원 등에 대해 들어봤으면 한다
▲초려의 학맥은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과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을 스승으로 모셨기 때문에 조광조(趙光祖) – 이이(李珥) – 김장생(金長生)으로 이어지는 기호학파 속에서 이루어졌다. 초려는 낙향해 있을 때 김집과 함께 <율곡연보>를 교정하기도 하였다.

초려는 15세 때에 진잠에 거주하던 만희(晩喜) 민재문(閔在汶)을 스승으로 모셔 취학하였다. 가난한 형편에 간장만으로 밥을 먹으며 대단한 노력으로 공부를 하여 학문이 날로 성취되었다. 18세에 민재문 선생이 ‘나로서는 그대를 더 가르칠 수 없으니 김사계(金沙溪)에게 가서 배우라.’고 하였다.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을 스승으로 모신 초려는 학문의 진보가 나날이 달라졌다. 사계는 “큰 유학자다. 오도(吾道)의 부탁이 이 사람 이유태에게 있다!”라고 하였다.

이 때 사계 문하에서는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동춘(同春) 송준길(宋浚吉)이 함께 공부하고 있었다. 셋은 서로 약속하기를 “우리 세 사람 중에 한 사람이라도 허물이 있으면 마땅히 함께 벌을 받을 것이다.”라고 약속하였다. 사계의 아들인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은 “그대들 세 사람은 한 몸으로써 두 사람이 된 것과 같다.”라고 하였다. 송시열은 “살아서는 뜻이 같고 죽어서는 전하기를 같이 하여 은의가 골육지친(骨肉之親)과 같다.”고 하였다.

초려는 금산에서 척화론(斥和論)을 주장하다가 유배된 팔송(八松) 윤황(尹煌)을 찾아뵙기도 하였고 집으로 찾아온 그 아들들인 동토(童土) 윤순거(尹舜擧), 석호(石湖) 윤문거(尹文擧), 미촌(美村) 윤선거(尹宣擧)와도 교분을 나누었다. 그 후 윤문거와는 사돈 관계를 맺기도 하였다. 초려의 장남 이옹의 부인이 윤문거의 딸로써 윤선거의 아들 윤증과 사촌간이다.

또한 공조좌랑에 있으면서 친청파들을 배척하고 북벌론의 태두로 흠모하던 청음 김상헌을 신구하기도 하였다. 이 상소는 <효종실록> 2권 효종 즉위년 9월 2일에 ‘공조좌랑 이유태가 파벌의 폐단을 아뢰다’로 실려 있다.

이 상소 이후에 초려는 벼슬에서 떠나 있었고 사림의 중망(重望)이 되어 있었다. 김장생의 손자 김익희는 효종에게 “신은 본디 그 사람됨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학문이 고명하고 시무를 통함으로써 세상 사람들은 송준길, 송시열보다 높다고 합니다. 어찌 상소 하나의 잘못으로 사람의 평생을 단정할 수 있겠습니까? 신은 참으로 그 사람이 얻기 어려운 사람임을 알기 때문에 매번 별천(別薦)에서 천거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효종실록> 19권 효종 8년(1657년) 10월에 효종이 석강에 나갔는데 강을 마치자, 찬선 송준길(宋浚吉)이 아뢰기를, “전날 지금 세상에서 제일가는 사람이 누구냐고 하문하셨는데, 신이 감히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방정하고 독실하기로는 신이 송시열이나 윤선거(尹宣擧)만 못하고, 여유 있고 원만하기로는 신이 이유태(李惟泰)만 못하고, 재기가 번뜩이고 해박하기로는 신이 유계(兪棨)만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초래가 임병양란 이후 주로 어떤 활동을 펴나갔는가 
▲초려는 24세(1630) 때 과거의 예비시험인 별시(別試)에 합격하였으나 어머니의 병으로 최종시험인 전시(殿試)에는 나가지 않았다. 이후 과거시험에 응시하지 않았다. 28세 때 희릉참봉에 임명되었고 6개월 후인 다음해에 어머니를 떠나기가 어려워 벼슬을 내놓고 귀가하였다. 30세 때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직전 8월 건원릉 참봉에 임명되었고 겨울에 난리가 일어나자 다음해 2월 도보로 험난한 길을 돌아서 금산으로 귀가하였다.

초려는 병자호란 이후 청(淸)과의 화친에 분개하여 벼슬에 생각이 없었다. 32세에 무주(茂朱)의 산미촌(山味村)에 은거하였다. 서재 뒤에 암석의 봉우리가 우뚝 솟아 주자(朱子)가 강학하던 무이대은병(武夷大隱屛)과 비슷하여 은병서재(隱屛書齋)라고 이름하고 학문을 강마하며 제자 교육에 열중하였다.

33세 때 대군사부(大郡師傅), 35세 때 내시교관(內侍敎官), 38세 때 대군사부, 40세 때에 다시 대군사부, 41세 때에는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자의(諮議)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때 미촌 윤선거, 시남(市南) 유계(兪棨)와 서로 방문하며 교분을 나누기도 하였다.  당시 옥당관(玉堂官)으로 있던 창주(滄洲) 김익희(金益熙)는 “지금 세상에 절개를 갖추고 깨끗한 인재로는 전 지평(持平) 송준길, 전 현령(縣令) 송시열, 전 사부(師傅) 이유태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이들은 독서를 하고 은거하며 행의(行誼)가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하여 충청과 호남의 학자들이 크게 신뢰하고 있고 서울 지역의 선비들도 소문을 듣고 이들에게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한 시대의 훌륭한 선비들입니다.”라고 하였다.

1649년 43세 때 5월 인조가 승하하였다. 효종이 등극하고 7일 만에 김집(金集),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 이유태(李惟泰), 권시(權諰) 등에게 신하를 부르는 소지(召旨)를 내려 올라오도록 했다. 1차 밀지 5신이다. 이 때 초려는 벼슬에 나갈 생각이 없었으나 스승으로 모셨던 김집이 거취를 함께 하길 권유하였다. 이에 초려는 효종이 동궁으로 있던 시절 “오랑캐를 토벌한 한(漢)무제(武帝)가 정치만을 잘한 한(漢)문제(文帝)보다 낫다.”고 하였다는 말을 듣고는 효종이 북벌에 큰 뜻이 있다고 판단하여 출사하기로 하였다.

이 때 초려는 공조좌랑(工曹佐郞)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조정에는 김자점(金自點)을 비롯한 낙당(洛黨)의 친청파들이 득세하고 있었다. 초려가 북벌론의 태두로 흠모하던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도 낙당(洛黨)계에 밀려 있었다. 초려는 임금에게 상소를 올려 사직을 요청하였으나 “멀리 떠나 돌아오지 않을까 마음을 죄고 있었다. 올라와서 나의 마음을 위로해 주니 충성심을 알겠다. 사양하지 말고 일을 보살피라.”고 비답을 내리면서 윤허하지 않았으므로 초려는 드디어 벼슬에 나갔다. 그리고 3개월 만에 친청파들의 죄상을 논하는 상소를 올리고 즉시 낙향하였다. 이후 30여 차례나 관직을 제수하는 교지를 내려졌지만 나가지 않았다.

-우리역사상 최고의 상소문으로 일컫는 ‘기해봉사’에서 추구하고자 했던 국정혁신 대 개혁안의 주요내용은 무엇인가
▲기해봉사는 국정의 모든 분야에서 개혁해야 할 폐단과 보국안민 정책을 세세하게 언급하고 있다. 폐단은 7가지 분야로 제시하고 있다. 보국안민 정책은 3강령에서 16조목으로 제시하고 있다. 개혁 정책 실현을 위하여 견인차 역할을 할 군주에 대한 교육론으로 수기(修己) 7단계, 제궁가(齊宮家) 4조목, 치국(治國) 이론을 제시하고 있다.

새로운 개혁안으로 제시한 보국안민 정책은 <기해봉사> 전체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3강령에 16조목으로 되어 있다. 3강령엔 정풍속(正風俗), 양인재(養人才), 혁구폐(革舊弊)로 되어 있는데 각기 3조목, 5조목, 8조목을 두고 있다. 왕조실록에도 봉사의 길이가 너무 길었기에 전체가 실려 있지 못하고 이 부분이 <현종개수실록 3권> 현종 1년 5월 9일에 등재(登載)되어 있고 그 시행에 있어 갑론을박(甲論乙駁)한 내용이 실록과 개수실록에 계속하여 수록되어 있다.
  정풍속(正風俗)은 당시 두 차례의 전란으로 말미암아 백성들이 불안하였기 때문에 먼저 풍속을 정화하여 사회를 안정화시키자는 것이었다. 정풍속의 절목에는 향약(鄕約), 오가통(五家統), 사창(社倉) 등 3가지를 두었다.

양인재(養人才)는 혼란한 시대에 국가를 지탱할 인재들이 필요하였으며 새시대를 준비하기 위하여 적재적소(適材適所)에 맞춤한 미래 인재를 키우기 위한 방안이었다. 양인재의 절목으로는 학교(學校), 연영원(延英院), 과거법(科擧法), 오위(五衛), 군자별창(軍資別倉) 등 5가지를 두었다.

혁구폐(革舊弊)는 <기해봉사>에서 가장 중요하고 절실하였던 기존의 잘못된 폐단을 개혁하는 일이었다. 혁구폐의 절목에는 내수사(內需司), 공안(貢案), 부세(賦稅), 인역(人役), 양전(量田), 태용관(汰冗官), 구임(久任), 금치습(禁侈習) 등 8가지를 두었다.

초려는 이어 16조목에 대한 개혁을 실시하고 이를 통하여 나타나는 효과를 언급하고 있다. 개혁은 하고자 하는 의지에 달려 있으며 개혁이 이루어짐으로써 멀지 않아 태평성대가 도래할 것임을 전망하고 있다. 나라에는 빈둥거리는 무리가 없어지고 논밭에는 농사짓는 백성이 많아질 것이라 말하고 있다.

이렇게 <기해봉사>는 역사상 최고의 상소문이다. 길이, 저술 목적, 내용, 구성, 표현 방법, 파급된 영향 등에서 다른 상소문들과는 비견될 수 없는 의의와 가치를 지니고 있다. 길이가 무려 4만여 자(字)로 상소문 중에 최장(最長)이다. 본소(本疏) 2만여 자와 별책 부록으로 첨부한 향약 2만여 자로 이루어져 있다. 한두 가지의 현안이나 사안에 관련한 글이 아니라, 국정 전반을 다루었기에 그만큼 개혁을 언급할 내용이 많았던 것이다. 

-시대정신에 맞춰 초려선생의 정신과 사상을 반추해 보면 어떻게 요약할 수 있는가 
▲초려가 꿈꾸었던 사회는 인과 덕을 갖춘 선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선한 사회였다. 그러한 시대의 모습은 요순시대에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법도를 따라야 하는 것도 많았고 고칠 것도 많았다. 그러기에 초려는 적극적으로 개혁하여야 된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가장 중요한 개혁의 첫걸음은 위로부터의 개혁이었다. 주로 임금부터 개혁의 모범을 보이는 것이었고 왕족의 특권을 제한하고 면세를 없애며 궁중의 법도를 엄격히 하고 사치를 금하라는 것이었다. 또한 개혁의 적극적인 시행을 희망한 부류는 신진 사림 즉 지위가 낮은 벼슬아치들과 재야에 묻힌 산림학자들이었다. 백성들의 삶과 국가의 안정을 바라는 충성심이었다.

그러나 적극적으로 반대 입장에 선 사람들은 영의정을 비롯한 고관대작의 기득권 세력이었다. 공적인 대의를 위해서는 현안별로 찬성하는 입장을 보이기도 하였으나 사적인 이익 면에서 면세 특권을 없애고 권리를 제한하며 특권을 누리던 힘을 쪼개고 제한하는 개혁에 대해서는 임금에게 갖가지 이유를 들어 시행을 막았다.  또한 가난으로 삶을 지탱하기 어려운 백성들을 위한 사창 운영, 인재 양성을 위한 학교 개혁, 병사 행정을 공정하게 하기 위한 인역 등에 대한 논의가 실록에 전혀 보이지 않는다.

초려도 처음에는 임금이 적극적으로 개혁을 추진할 의사를 보임에 출사하였으나 기득권 세력이 사익을 조금도 포기하지 않는 조정의 돌아가는 여론에 실망하여 낙향하였다. 임금은 초려와 함께 일하고자 여러 번 초려를 불렀으나 초려는 이 상소문의 말은 자신의 말이 아니라 성현의 말씀이며 모든 것은 임금의 실행 의지에 달려 있어 임금이 한다면 하는 것이고 임금이 하지 못한다면 못하는 것이라고 하며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결국 <기해봉사>는 실행되지 못하고 문집과 실록의 기록 속으로 사라졌으나 개혁 사상은 큰 울림이 되었으며 35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현실에 반영하고 적용할 내용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백성들의 삶을 윤택하게 하고 사회의 안정과 나라의 강성함을 희구하여 국정 전반의 개혁을 바라는 의식이 높아져서 <기해봉사>는 조선 후대에까지 큰 영향을 끼쳤다. 초려가 지적한 이러한 현실 정치의 폐단은 역사가 되풀이 되며 백년, 이백년이 지난 후에도 그대로 반복되었고 이에 대한 개혁을 요구하는 글은 이후 실학자들에게 이어졌다. 그러나 기득권층이 사익추구를 버리지 않는 한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할 뿐이었다.

초려의 <기해봉사>는 조선 후기 전란으로 고통 받는 백성들의 선한 삶을 위하여 국정 전반에 걸쳐 개혁을 요구하는 커다란 메아리가 되었다. 그러나 기득권층의 배척으로 실행에 옮겨지지 못했지만 오로지 백성과 나라를 위하는 최고의 걸작이었다. 또한 그가 외쳤던 개혁정신과 개혁정책은 오늘날의 사회 전반을 개혁하는데 교과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끝으로 충청5현으로 표현되는 선생의 경세사상을 구체적으로 정리해 달라
▲오늘날 ‘경세’라는 단어를 잘 쓰지 않지만 조선시대에는 ‘경세(經世)’와 ‘경제(經濟)’는 나라를 다스려 백성들을 잘 살게 하고자 하는 같은 의미로 많이 쓰인 단어다. 오늘날 ‘경제’의 뜻은 생활하는데 있어서 필요로 하는 재화나 용역을 생산·분배·소비하는 모든 활동을 일컫는 economy의 좁은 의미로 쓰이고 있지만 조선시대 ‘경제’의 뜻은 이른바 경세제민의 준말로 나라를 다스린다는 커다란 의미로 쓰였던 것이다.  <기해봉사>에 쓰인 4자 성어(成語)들을 그대로 인용하여 초려의 경세사상 몇 가지만 살펴보겠다.

첫째는 손상익하(損上益下)다. 이는 윗사람의 것을 덜어서 아랫사람에게 보태준다는 것이다. 주역에 나와 있는 말을 인용한 것이다.

둘째는 상행하효(上行下效)이다. 이는 윗사람이 모범을 보여 먼저 행해야 아랫사람이 본받아 행한다는 것이다. 리더가 솔선수범해야 팔로워도 따라 온다는 것이다. 관리와 백성도 마찬가지다. 손상익하와 상행하효는 기득권층에 가장 부담이 되었던 말이다.

셋째는 시관택재(視官擇材)이다. 이는 관직을 보고 인재를 선택하는 것 즉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해야 된다는 것이다. 친소(親疎)에 따라 벼슬을 내려서는 안 된다. 능력과 역량을 중시해야 된다. 특히 문과 과거시험에 활쏘기와 말타기 과목을 두어 문관도 무재를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넷째는 봉공망사(奉公忘私)이다. 이는 공무원으로 봉사하며 사적인 이익을 챙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상급 관리이건 하리(下吏)이건 멸사봉공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다섯째는 동인일시(同仁一視)이다. 모든 백성들을 인(仁)으로 차별 없이 동일하게 하나로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유학의 기본 이념인 왕도정치에서 나온 것이다.

여섯째는 인역일동(人役一同)이다. 인역은 오늘날로 말하면 국민들이 국가를 위해 행할 의무를 말한다. 인역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병역이며 조세의 납부도 이에 해당된다. 이 인역에 모두가 하나로 동일해야 한다는 것이다. 양반 계층이라 덜하고 상민·천민이라 더 부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일곱째는 정위통행(定爲通行)이다. 이는 국가에 표준화 규정을 만들자는 것이다. 오늘날로 말하면 KS인증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다. 당시에 쌀로 납부하던 방식이 포로 납부하는 포납화(布納化) 방식으로 바뀌면서 포의 규격이 지역마다 다르면서 불만이 많았다. 이를 해결하고자 한 개혁방안이었다.

여덟째는 양입위출(量入爲出)이다. 이는 수입을 헤아려 지출을 한다는 국가 예산집행의 원칙을 개혁하자는 것이다. 양출위입하는 것은 백성들을 고려하는 예산 원칙이 아니다.

아홉째는 시상무용(市上貿用)이다. 이는 시장에서 구입해 사용하는 것이다. 과거에는 공물을 바치는 폐단이 극심했다. 미납(米納)으로 대신해 받은 것으로 시장에서 구입해 쓰라는 것이다. 이는 상업의 발전을 가져오는 계기도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