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승현 ‘우렁이 무침에 쐬주 한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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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승현 ‘우렁이 무침에 쐬주 한잔’
  • 세종매일
  • 승인 2023.06.12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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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사라져 가는 풍경들

11 동네 군 서는 날

▲장승현 작가.
▲장승현 작가.

어제 저녁 옆 동네에서 술을 마셨다. 돼지를 기르는 후배와 숯불에 촉촉살을 구워 마신 술이 조금은 무리했나 보았다.

아침에도 술이 덜 깨어 헤매고 있는데 어머니의 닦달하는 소리가 들렸다. 

“야, 빨리 일어나. 동네 사람덜 오늘 서당 풀 깎기루 했어.” 

“뭔 소리유, 풀은 무슨 풀을 깎는다구…….” 

새벽 5시 반이었다. 그렇지만 동네 일이라는데 안 일어날 수가 없었다.

술이 덜 깬 상태로 예초기를 점검했다. 며칠 전 복숭아밭을 깎고 나서 휘발유도 얼마 안 남은 것 같고, 예초기 날도 다시 갈아야 할 것 같았다. 이렇게 갑작스레 풀 깎으러 나오라고 하면 어떻게 한단 말인가. 

나는 일단 예초기 시동을 걸어보았다. 처음에는 시동이 잘 안 걸리더니 천식 걸린 것처럼 빌빌대며 겨우 걸렸다. 저번에 예초기를 손보러 갔을 때 엔진 뭐가 안 좋다고 5만원 정도 주고 갈아야 한다고 했다. 

예초기를 돌려 우선 마당에 있는 잔디를 좀 깎아 보았다. 힘은 없지만 그냥그냥 쓸 만했다. 

“빨리 가봐! 사람들 나오는 것 같은디…….”

어머니가 꾸무럭대고 있는 나를 보더니 답답한지 또 소리를 질렀다. 

정말 서당 쪽에선 예초기 엔진 소리가 두어 개 들리는 것 같았다. 예초기를 짊어지고 옆집 8촌 형님댁 옆을 지나치려니까 8촌 형님이 나오면서 말을 건넸다. 

“아침 먹고 시작한다고 하던디…….”

“저기 소리 나잖아요. 벌써 시작했는데요.” 

시골에서의 약속은 이랬다. 몇 시가 아니라 저녁 먹고, 아침 먹고, 새벽에 일어나자마자, 뭐 이런 식으로 공지를 해도 대부분 사람들은 일찍 나와 기다렸지 절대 늦는 일이 없었다. 

오늘 생각해 보니 동네 사람들이 다 모이는 게 아닌 것 같았다. 

집성촌인 장씨들 동네라 친척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기 때문에 서당 일이란 장씨들 일이었다. 얼마 전에 군에서 문화재로 채택되어 다시 집을 지을 서당 주변을 정리하는 일이었다. 

동네 일을 하다 보면 사람들이 장씨들인지 타성인지 헷갈릴 때가 종종 있다. 보통 옛날에는 동네 사람들이 전체 모여 동네 일을 하는 걸 ‘군 선다’고 했다.

장씨들 중에 예초기를 멜 수 있는 사람 10여 명이 모였다. 

70이 가까운 조카뻘 되는 분부터 60이 넘은 손자 뻘 되는 분, 그러고 보니 내가 동네에서 항렬이 제일 높은 ‘현’ 자 돌림이었다. 

그런데 40대는 나 혼자뿐이었다. 제일 높은 항렬이지만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밑에서 궂은일을 해야 하는 군번이었다. 

예전에는 동네에 군 서는 날이면 지게와 낫을 들고 다들 나왔다. 

동네 어귀에 지게를 받쳐놓고 풀을 베어 자기네 거름탕에다 쌓아놓곤 했었다. 

그러나 요즘의 풍경은 거름을 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고, 대부분 비료만 땅에다 잔뜩 뿌려대고, 집집마다 경운기나 오토바이에 예초기를 싣고 나온다. 젊은 사람들은 1톤 트럭에 예초기를 싣고 나오는 사람도 있었다. 

10여 명이 예초기를 윙윙거리며 돌려대고 나머지 노인네들은 갈퀴나 낫을 들고 풀을 긁어냈다. 그 엄청난 예초기 소리 와중에도 서로 말 한 마디 없이 알아서 착착, 역할 분담까지 하며 그 넓은 산정을 다 깎았다. 

젊은 층은 양 바깥쪽을 맡았고 그중 나이 먹은 층들은 봉분이 있는 쪽에서 깎았다. 이런 일들이 말 한 마디 없이 서로 눈치로 알아서 역할 분담을 한다는 게 신기하기도 했다.

조금 있으니까 예전에 예비군 중대장을 했고, 지금은 종중 총무를 보고 있는 의현이 형수님이 함지박에 무엇을 잔뜩 담아 머리에 이고 올라오시는 게 보였다. 그 자리에서는 항렬을 떠나서 나이로 봐서 내가 예초기를 집어던지고 달려가야 했다. 

“이거 힘들게 이런 것까지…….”

“이거 저기 조카님이 찹쌀을 갖다 줘서 새벽에 무친 인절미요.”

소주 두어 병과 함께 함지박에 담겨온 인절미 맛은 정말 기가 막혔다.

 약간 짭짤하고 고소한 깨 맛이 들어간 인절미는 새참거리 치고는 아주 훌륭한 새참이었다. 일은 거의 다 끝나가고 멀리 내려다보이는 안뜰을 바라보며 먹는 아침 인절미 새참 맛은 별미 중에 별미였다. 

종중 서당 주변 풀 깎는 일이 끝난 시간은 아침 7시가 안 된 시각이었다. 

풀베기가 끝나자 그 지리한 장맛비가 또 한 차례 쏟아붓기 시작했다. ‘비도 오겄다’ 시골에서의 비오는 날은 늘어지는 아침이었다. 

벌써부터 노인네들은 오늘 아침부터 포기한 것 같았다. 소주를 컵으로 한 잔씩 돌리고 중대장 집에 가서 한 잔을 더 하자느니, 뭐 어제 궈먹던 괴기가 있다느니, 부침개나 부쳐 한 잔 더 하자느니 서로 충동질을 하고 있었다. 

나도 아직 술이 덜 깬 몸에 소주 한 컵을 들이키니 알딸딸하니 기분이 삼삼해지기 시작했다.

‘에라, 모르겠다.’

나도 집에 들어가 씻고 한 잠 더 퍼지게 때려야 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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