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려(草廬) 이유태(李惟泰)선생 후예들의 유가학문(儒家學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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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려(草廬) 이유태(李惟泰)선생 후예들의 유가학문(儒家學問)
  • 김상대(절재역사공원 종무 도유사)
  • 승인 2024.03.13 2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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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대(절재역사공원 종무 도유사) 

초려 집안과의 인연은 지금부터 60여년전 16세의 소년으로 필자가 엄동설한 폭설로 차량통행이 두절되어서 금산의 산골인 성산(星山)에서 공주 중호동(中湖洞)까지 걷고 다시 차로 이틀 만에 대유학자 집안 현민(玄民) 이종선(李鍾宣)선생 문하(文下)에 당도하였다.
  현민선생께 예의를 갖추고 유가(儒家)의 학문을 청하니 선생이 요즘 세상은 공맹(孔孟)의 학문을 모두 저버리는데 이찌 유학을 배우시려는가? 하면서 현사양붕(賢師良朋)이 좌우보익(左右補益)하면 마중지소(麻中之蘇)의 결실이 있을 것이다고 하시면서 승락하였다. 
그 날로 부터 현민 문하에서 사서(四書)와 시경(詩經)을 열심히 학습하였다. 

현민은 초려선생의 11대손으로 필자는 이 때부터 초려가(草廬家)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초려 문헌공(文憲公) 이유태 선생은 조선 중기 효종 때 대유현으로 사계(沙 溪) 김장생과 신독재(愼獨齋) 김집의 문하에서 우암(尤菴) 송시열, 동춘(同春) 송준길, 미촌(美村) 윤선거, 시남(市南) 유계 선생 등과 수학하면서 교유한 “충청5현” 가운데 한 분이다.
충청5현은 조선 중기 국정 혁신 대개혁안을 주창한 경세사상가(經世思想家)를 지칭한다.

초려선생은 유학의 경전과 예학에 높은 경륜과 학덕을 겸비한 기호사림을 대표하는 유현이다. 
초려는 효종조에 김집, 송시열, 송준길 선생 등과 함께 효종의 밀지(密旨)를 받고 조정에 나아가 북벌(北伐)을 논한 인물로 역대(歷代) 최고의 상소문인 “기해봉사(己亥封事”)에서 밝힌 선생의 민본(民本), 민생(民生)을 바탕으로한 국정 혁신사상과 국정 대개혁의 주장은 조선 중기 이후 조야(朝野)에서 이를 쓸 것인지, 말 것인지를 가지고 논쟁만 하다가 말았다. 

초려선생은 기해봉사에서 제창한 왕도정치의 실상과 그 폐단을 비판하면서 조정의 무너진 기강을 바로 세우고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하고자 제시한 구치(求治) 임사(任事) 강도(講道) 조사(造士) 구민(救民) 향선(向善) 교령(敎令)의 실제공력이 없는 일곱 가지 고착된 폐단을 과감하게 혁신할 것을 주장하였다.
또한, 기해봉사에서 초려선생의 경세실학과 국정개혁에 대한 강령과 조목으로 정풍속(正風俗) 향학실천(鄕學實踐) 오가통제(五家統制) 사창(社倉)운영 인재양성(人材養成) 연영원(延英院) 과거법(科擧法) 오위(五衛) 군자별창(軍資別倉)의 시행을 주창(主唱)하였다. 
초려는 인재양성에서 모든 백성이 귀천에 관계없이 10세에 숙학(塾學)에 입학하고 우수한 인재는 사학(四學)이나 성균관에 진학하게 하였다. 

또한, 모든 백성에게 군병역을 균등하게 수행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 당시 지배계층의 양반들은 군병역을 면제받는 불공정한 현실을 통탄하고 모든 백성에게 병역의 균등시행과 광범위한 인재양성의 기회평등을 부여하자고 강력 주창하였다.

초려는 성군론(聖君論)으로 위학위치지법(爲學爲治之法)을 주장하여 군주의 수양(修養)을 으뜸으로 수기(修己)를 제시하여 입지(立志) 수렴(收斂) 궁리(窮理) 성실(誠實) 양기(養氣) 정심(正心) 검신(儉身)을 주창하였다. 

다음으로 제가(齊家)에서는 정윤리(正倫理)와 독은의(篤恩義) 할 것을 제시하면서 제세안민(濟世安民)의 정치요체(政治要諦)가 군주의 일심(一心)에 국운융성의 성패가 달렸다고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초려선생이 제시한 기해봉사는 탁월한 국가경영의 도리와 국정쇄신 정책임에도 불구하고 주장한 정책이 실행되지 못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초려선생이 생존했던 당시 군주의 자질과 조정의 신료들에게 기해봉사에서 제시하는 국정 혁신개혁은 왕도정치의 기득권 세력들의 폐해를 타파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당시 군주와 신료들이 수용할 수 없는 것으로 초려의 기해봉사의 국정 대혁신안은 실행되지 못하였다. 
초려선생의 인품과 학문은 그 집안 후예들에 의해 연연히 전승되었다. 
후예들이 유학을 숭상하여 수행한 활동을 살펴보면 근세에 먼저, 성암(醒菴) 이철영(李喆榮) 선생에 이어 긍당(肯堂) 이규헌, 농포(農圃) 이규설(李圭卨)과 초당(草堂) 이규룡(李圭龍)선생이 그 학문적 연원을 계승하고 학통을 이었다. 
그리고 그 학문적 뜻과 정신은 현민(玄民) 이종선(李鍾宣), 강헌(剛軒) 이종순(李鐘醇), 병주(屛洲) 이종락(李鍾洛) 그리고 아당(峨堂) 이성우(李性雨) 선생이 초려의 사상을 전승하여 유가(儒家)의 학문을 창달하는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성암선생은 유가의 경전연구와 후학양성에 힘쓰면서 성리학자로 성삼양설(性三樣說)을 주장한 대유학자이다. 
일제강점기 일제의 대한침탈과 식민지정책에 맞서 성암은 “차라리 죽어서 조선의 귀신이 될지언정 살아서 일본의 백성이 되는 치욕을 받을 수 없다”고 하였다. 
성암은 일제의 침탈에 대한 그 부당성을 통렬하게 꾸짖고 일본 정부에 치일국정부서, 재치일국정부서(致日國政府書, 再致日國政府書)를 보내 일본의 만행과 국모 시해사건,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규탄함으로서 일본 위정자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 
성암은 항일운동으로 수 차례에 걸친 옥고와 왜경의 혹독한 고문에도 굳건한 선비의 기상과 항일애국지사로서 그 기개를 떨쳤다. 
성암의 지서로는 사상강설(泗上講說), 항의기사(抗議記事), 부풍옥중일기(扶風獄中日記), 내범요람(內範要覽)과 문집으로 성암집(醒庵集)이 전한다. 

다음으로 긍당선생은 용문서원을 건립하여 초려선생의 학문을 계승하고 후학을 양성한 유학자로 긍당문집(肯堂文集)을 남겼으며 영농실학을 중시한 농포 선생은 농포문집(農圃文集)을 전하였고 성암의 아드님 초당선생은 초당집(草堂集)을 후세에 남겨 초려의 학통을 이어 받았다.

현민선생은 초려의 도학사상과 경세실학을 숭상한 유학자로 초당선생과 함께 유림(儒林)의 발의(發意)로 시작된 성암의 사우 숭의사(崇義祠) 건립과 초려와 성암문집 간행을 통하여 우리 전통문화의 계승발전과 현실에 초월하는 윤리를 중시하였다. 
공주 유림이 현민을 추대하여 충현서원의 원장과 공주향교의 전교(典校)를 여러 차례 역임하였다. 
이 때 경기와 충청 영호남지역의 유림을 규합하고 성균관을 비롯하여 전국 서원과 향교을 대표하는 조직을 구성하여 거국적으로 “가족법개정”을 반대하는 범국민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하였다. 
현민선생 사후에 후학들에 의해 현민집(玄民集) 3권과 별책 1권 등이 발간되었다. 

현민의 아우 강헌선생은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으로 한국역사편찬과 사학문화발전에 크게 기여하였고 시서문학과 묘지문 등 강헌집(剛軒集) 2권이 간행되었다. 
병주선생은 천부적인 총명함으로 소년시절에 이미, 유가경전과 사기에 능통하였다. 
또한, 한국교원대와 공주대 등에 출강하면서 경서 강의와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의 두주(頭註)를 발간하였고 대전 청유서당을 개설하여 경전강론과 더불어 사서집주(四書集註)를 저술하여 간행하였다. 
저서로는 고희문집 1권과 병주문집(屛洲文集) 2권이 전한다.

아당 이성우 선생 역시, 현대 유학계에 마지막 남은 유학자로 유학의 경전을 통달하여 시문과 서한문 그리고 묘지문 등 수 백편을 저술하였고 한국 서예계에 대가로 수 많은 불후의 금석문을 남겼음이 주지의 사실이다. 
아당은 연세대, 경북대, 충남대, 한남대 등 유학경전 강좌을 열어 30여년 동안 수 많은 후학을 양성하는데 공헌하였다. 
또한, 대전의 청유학당과 온지당(溫知堂), 세종의 갈산서원, 공주 용문서원 그리고 현민서실에서 경전강의는 물론, 한인학선(韓人學選)과 몽학동감(蒙學東鑑)을 편술하여 후학들을 교육하였다. 
특히 세종시 도움 1로 40 소재, 초려의 묘역 이전과 관련하여 문중의 종원(宗員)들과 합심하여  “전국유림총궐기대회”를 개최하여 정부와 오랜 투쟁 끝에  “초려역사공원” 을 조성하고 초려의 갈산서원(葛山書院) 복원까지 마쳤다. 
이 공원에 기해봉사개요도(己亥封事槪要圖)와 문헌공초려이선생묘역수호사적비를 세워 초려 묘역을 수호하고 유학사상을 집대성하는데 크게 기여한 바 컸다.

필자는 현민가(玄民家)에서 금산으로 돌아와 공직자로 단종조 이조판서 묵재(默齋) 김종한(金宗漢)과 충익공 좌의정 절재(節齋) 김종서(金宗瑞) 형제 분을 모신 숭절사(崇節祠)를 건립하고 선현의 업적을 기렸다. 
또한, 세종시 장군면에 “절재역사공원” 사업을 제안하여 충익사(忠翼祠)와 숭인당(崇仁堂)을 창건하였고 절재선생의 육진개척과 고려사와 세종실록을 편찬한 불멸의 업적을 흠모하면서 봉안제문을 삼가지어 불천지위(不遷之位) 대제향을 봉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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